여전히 의심 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인지. 매트릭스처럼 또 다른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 동굴의 우화를 비유로 들었다. ‘동굴의 우화’란 동굴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동굴 밖 횃불에 비친 동굴 속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고, 반응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이에 빗대어 플라톤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이데아)가 아닌 허상, 이데아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보는 세상은 동굴 속 그림자이며 인간은 동굴 밖에 존재하는 실체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플라톤의 사상은 영화 ‘매트릭스’로 이어진다. 워쇼스키 자매? 는 매트릭스 촬영 전, 배우들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꼭 읽어보고 촬영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먼저, 시뮬라크르는 가짜, 허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플라톤이 말한 ‘동굴에 비친 그림자’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조금 더 현대적인 개념으로 변주시켰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현대 사람들이 인식하는 일종의 세계다. 현대사회는 ‘그림자’가 ‘실체’를 압도하는 사회다. 따라서 실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만들어진 가상의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가상의 이미지들은 무한히 복제되고 퍼져나간다. 어느 순간 그림자와 실체가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게 실체는 그림자에 의해 압살 되고 결국, 그림자가 실체를 대체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에 열광한다. 하지만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의 실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체라고 믿고 있는 세계, 그림자의 세계가 살아가는데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때 밈처럼 돌아다녔던 엘라스틴으로 머리를 감고 bhc치킨을 먹는 ‘전지현의 하루’를 떠올려보자. 동굴 밖 실체가 아닌 동굴 속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고 반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이러한 가상의 이미지를 사람들이 따라 하는 것을 두고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시뮬레이션)’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작곡가 유희열의 표절논란으로 요즘 시끄럽다. 동굴 밖 실체를 마주한 대중들의 분노가 쉽사리 멎지 않고 있다. 이제껏 동굴 속 그림자를 실체로 믿고 살아왔는데 동굴 밖 실체를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의 노기가 여기저기서 폭발하고 있다. 유희열 사태의 본질은 표절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사람들의 믿음체계를 붕괴시킨 것.
유희열의 노래를 듣고 살아온 나의 시간이 실체가 아닌 그림자의 시간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유희열의 노래가 가짜라고 판명 나는 순간, 지금껏 살아온 나의 시간, 즉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실체)을 마주할 때면 때론 불편해진다. 선의의 거짓말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실체도 진짜 실체가 아니라 또 다른 동굴 속 그림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나만의 세계, 프레임, 앵글에 있다. 어차피 절대적인 정의와 진리는 없기에.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타인이 바라보는 ‘나’라는 이미지 역시 타인 개개인마다 상대적으로 다르게 보이고 느끼기 때문에.
여전히 의심 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인지. 매트릭스처럼 또 다른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 동굴의 우화를 비유로 들었다. ‘동굴의 우화’란 동굴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동굴 밖 횃불에 비친 동굴 속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고, 반응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이에 빗대어 플라톤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이데아)가 아닌 허상, 이데아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보는 세상은 동굴 속 그림자이며 인간은 동굴 밖에 존재하는 실체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플라톤의 사상은 영화 ‘매트릭스’로 이어진다. 워쇼스키 자매? 는 매트릭스 촬영 전, 배우들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꼭 읽어보고 촬영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먼저, 시뮬라크르는 가짜, 허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플라톤이 말한 ‘동굴에 비친 그림자’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조금 더 현대적인 개념으로 변주시켰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현대 사람들이 인식하는 일종의 세계다. 현대사회는 ‘그림자’가 ‘실체’를 압도하는 사회다. 따라서 실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만들어진 가상의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가상의 이미지들은 무한히 복제되고 퍼져나간다. 어느 순간 그림자와 실체가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게 실체는 그림자에 의해 압살 되고 결국, 그림자가 실체를 대체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에 열광한다. 하지만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의 실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체라고 믿고 있는 세계, 그림자의 세계가 살아가는데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때 밈처럼 돌아다녔던 엘라스틴으로 머리를 감고 bhc치킨을 먹는 ‘전지현의 하루’를 떠올려보자. 동굴 밖 실체가 아닌 동굴 속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고 반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이러한 가상의 이미지를 사람들이 따라 하는 것을 두고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시뮬레이션)’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작곡가 유희열의 표절논란으로 요즘 시끄럽다. 동굴 밖 실체를 마주한 대중들의 분노가 쉽사리 멎지 않고 있다. 이제껏 동굴 속 그림자를 실체로 믿고 살아왔는데 동굴 밖 실체를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의 노기가 여기저기서 폭발하고 있다. 유희열 사태의 본질은 표절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사람들의 믿음체계를 붕괴시킨 것.
유희열의 노래를 듣고 살아온 나의 시간이 실체가 아닌 그림자의 시간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유희열의 노래가 가짜라고 판명 나는 순간, 지금껏 살아온 나의 시간, 즉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실체)을 마주할 때면 때론 불편해진다. 선의의 거짓말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실체도 진짜 실체가 아니라 또 다른 동굴 속 그림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나만의 세계, 프레임, 앵글에 있다. 어차피 절대적인 정의와 진리는 없기에.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타인이 바라보는 ‘나’라는 이미지 역시 타인 개개인마다 상대적으로 다르게 보이고 느끼기 때문에.